TREND/CULTURE
‘간판이 없는’ 가게들이 있다. 언뜻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대서특필로 가게를 홍보해도 모자랄 판에 간판조차 달지 않는다니. 하지만 ‘아는 사람만 아는 곳’이라는 특징 때문에 젊은 층에서는 이런 곳들을 찾아가는 것이 작은 유행이 되었다. 일종의 ‘히든 마케팅’이라고도 불리는데, 남들은 잘 알지 못하는 나만의 장소를 발견하고, 그곳을 향유하는 것에 대해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냉장고 문 모양의 출입구로 SNS를 뜨겁게 달구었던 장본인, 동대문에 위치한 카페 겸 다이닝 바 ‘장프리고’다. 동대문과 연희동 사이, 특이할 것 없는 주택가를 걸어가다 보면 유럽의 여느 시장에서 마주칠 법한 과일 가게가 눈에 띈다. 색색의 신선한 과일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진열되어 있다. 시원하게 트여 있는 통유리창 너머로는 커다란 냉장고 문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모르는 사람은 주택가 사이에 있는 작고 예쁜 과일가게라고 생각하고 지나갈 법하다. 이곳의 히든 마케팅은 어떻게 성공한 걸까?
광택이 도는 스테인리스 소재의 냉장고 문. 문을 열면 각양각색의 과일이 잔뜩 들어있을 것만 같다. 장프리고의 ‘프리고’는 프랑스어로 ‘냉장고’를 뜻한다. ‘장’은 장프리고의 대표 장지호 씨의 성에서 가져왔다. 술안주로 과일을 최고로 꼽는 장지호 대표는 신선한 과일을 ‘요즘 감성’으로 제공하는 곳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장프리고는 그가 운영하는 하나의 과일 냉장고다.
장프리고는 주택가 한가운데, 카페 겸 다이닝바치고는 조금은 생뚱맞은 곳에 있다. 따로 주변 상권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근처에는 이곳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어르신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여타 카페나 주점처럼 운영할 시 거주자들의 반감을 살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주변 환경과 잘 융화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던 중 장 대표가 떠올린 것은 바로 과일 가게. 겉모습은 건전(?)한 과일 가게로 표현하되, 숨겨진 안쪽에서는 다양한 카페 및 다이닝 바 메뉴를 판매하는 전략이었다. 마치 겉으로는 모범생인 소년이 뒤에서는 몰래 일탈을 하듯이. 장프리고의 히든 마케팅이 시작된 지점이다.
장프리고에서는 실제로 과일도 판매하고 있다. 지인을 통해 질 좋고 신선한 과일을 들여와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한다. 가게에 들러 과일을 구매해가는 이들도 종종 있다. 주변에 거주하는 어르신 중에는 아직도 이곳이 과일가게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 집 근처에서 다양한 과일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어 좋아한다고.
이제 냉장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자. 4개의 냉장고 문 중 가장 왼쪽에 있는 문이 가게 입구다. 다른 문은 정말 냉장고이기도 하고, 또 다른 문은 직원 전용 통로이기도 하니 염두에 둘 것.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들어가고 나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장프리고는 크게 네 가지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가게 전면에 있는 과일 가게, 그리고 1층에 있는 바, 1층과 2층을 잇는 증원 공간, 그리고 어두운 조명이 분위기를 더하는 2층이다. 장소마다 오브제들이 지닌 감성, 조명의 조도, 그리고 선곡까지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들어진 공간이기에 어딘가 모를 편안함이 느껴진다.
장프리고의 곳곳에는 재미있는 요소들이 숨어있다. 메뉴를 주문하는 방법조차 평범하지 않다. 2층의 자리에는 자리마다 사과, 바나나, 토마토 등의 과일이 하나씩 놓여 있는데, 그 과일이 바로 자리의 이름이다. 주문할 때에는 구석에 설치된 공중전화에 백 원짜리를 투입한 후 자리 이름을 말하고 메뉴를 주문하면 된다. 예를 들면 ‘여기 사과인데, 딸기 주스 하나요’처럼.
조명 하나, 액자 하나에서도 장프리고만의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장프리고 2층의 한 벽면에는 장 대표가 직접 그린 카페의 지도가 있다. 가게 구석구석의 오브제들에 대해 애정 어린 묘사를 곁들여 놓았다. 하나하나 읽고 있자면 장프리고만의 작은 비밀 상자를 열어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공간 가득 알차게 채워져 있는 요소들을 살피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러간다.
장프리고는 신선한 과일을 취급하는 다이닝 바 겸 카페다. 12시부터 18시까지는 카페 메뉴를 즐길 수 있고, 18시가 넘어가면 다이닝 바로 운영된다. 장프리고에 방문했다면 과일 메뉴를 맛보는 것은 필수. 시원한 생과일을 즉석에서 통째로 갈아 만들어낸다. 눈을 즐겁게 하는 플레이팅 역시 장프리고만의 매력. 음료마다 어울리는 식용 꽃과 잎, 생과일을 올려 장식한다. 음료의 질감에 맞춘 다양한 컵과 빨대에서도 마시는 사람을 배려한 섬세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
과일을 주재료로 하는 만큼 디저트도 과일을 활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갓 구워낸 따뜻한 토스트 위에 먹기 좋게 자른 다양한 생과일을 잔뜩 올린 프렌치토스트도 장프리고의 인기 메뉴. 알록달록한 과일 위로 하얀 슈가파우더를 뿌린 플레이팅이 식욕을 돋운다.
장프리고에서는 카페 메뉴 외에 식사 메뉴 및 주류도 즐길 수 있다. 식사 전에 장프리고에 방문했다면 파스타를 맛보기를 추천한다. 커다란 타이거 쉬림프를 통으로 넣은 로제 파스타, 해산물을 듬뿍 넣은 오일 파스타가 일품이다. 여건이 허락된다면 칵테일을 한 잔 곁들여도 좋을 듯하다.
올해로 오픈 2주년을 맞은 장프리고.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자신만의 가게를 꾸려가고 있는 장지호 대표를 만나보았다.
Q. 간판이 없고 문 모양이 독특해요. 처음 오는 사람들은 찾아오기 힘들 것 같은데.
A. 정해진 기준에 맞춰 가게를 운영하다 보니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어요. 간판이 없으니 간간이 들리는 손님들도 장프리고가 정말 과일 가게인 줄로만 아셨고, 입구가 냉장고 모양이라 내부에 공간이 있는 것조차 모르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처음 6개월 동안은 거의 수익이 없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홍보나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해볼까 하는 유혹에도 흔들렸지만, 장프리고라는 공간이 가진 색깔이 퇴색될까 하는 우려 때문에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죠. 지금 많은 분이 장프리고를 찾아주시는 걸 보면 그때의 제 판단이 옳았던 것 같아 뿌듯해요.
Q. 자리마다 놓인 과일, 주문할 때 사용하는 공중전화, 녹은 껌이 붙어있는 듯한 현판, 다양한 액자 등 재미있는 오브제들이 많아요.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A. 장프리고라는 가게의 공간을 기획할 때 가장 주안점을 둔 건 ‘재미’였어요. 공간을 네 가지로 구성한 것도 같은 의도였고, 내부의 다양한 소품이나 조명도 재미있고 특별한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것으로 고심해서 골랐죠.
공중전화는 가게의 1층과 2층이 분리되어 있다 보니 손님들이 물리적으로 쉽게 주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떠올리게 됐어요. 향수를 떠올리게 할 수 있는 소품이기도 했고요. 또 전화 주문을 받으려면 주문하시는 분의 테이블을 알아야 하는데, 장프리고의 주재료가 과일이다 보니 자리마다 과일을 놓아서 구분할 수 있게 했죠. 곳곳에 전시된 그림은 제가 직접 지인들과 함께 건물, 공간, 과일 등의 소재를 활용해 제작한 작업물이에요. 곳곳에 제 손길이 묻어있다고 봐주시면 될 것 같아요.
Q. 낮의 장프리고와 밤의 장프리고는 사뭇 다른 것 같아요. 어떤 시간대의 장프리고를 더 좋아하시나요?
A. 낮의 장프리고는 가게 외관의 과일 오브제들을 좋은 채광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 신선한 과일 카페 메뉴들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낮에 장프리고에 방문하신다면 과일주스를 꼭 맛보시기를 추천해요. 생과일을 정말 많이 갈아 넣는, 자부심 있는 메뉴입니다. :)
밤의 장프리고는 사실 저의 회심작입니다. 인테리어 시 가장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이 조명이에요. 날이 어두워질수록 다양한 색의 조명을 켜는데, 그 오묘한 빛들이 만나 만드는 묘한 감성을 느껴보셨으면 해요. 또 저와 바텐더들이 많은 연구를 거쳐 시그니처 칵테일을 준비해두었는데요. 오픈 초반 제가 직접 만들었던 장프리고 칵테일을 추천합니다. 이외에도 광화문연가, 별헤는밤 DDP 등 지역 감성을 반영한 다양한 음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Q. 장프리고만의 운영 철학이 있다면?
A. 저는 운영 철학을 크게 두 가지로 정해두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입니다. 바른 인성을 가진 사람, 그리고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저와 오랜 기간 같이 걸어와 주신 직원들의 연구와 도움이 지금의 장프리고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발상입니다. 끊임없는 아이디어와 색다른 발상이 장프리고를 구성하고 있어요. 장프리고만의 색깔이 메뉴, 공간, 서비스 등 곳곳에 묻어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손님들이 그 노력에 잠깐이라도 웃어주신다면 정말 뿌듯할 것 같아요.
언제 방문해도 유쾌하고 만족스러운 공간으로 장프리고가 기억되었으면 한다는 장지호 대표. 진정성 있는 인터뷰를 통해 그의 노력과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여럿의 직원을 두었지만 매일 아침 가게에 출근하고, 직접 과일을 고르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는 그의 모습에서 장프리고가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힙한 카페 겸 다이닝 바를 찾는다면, 신선한 과일이 문득 끌린다면, 감성 가득한 분위기를 즐기고 싶다면 장프리고를 방문해보자. 장프리고만이 가진 그 특별한 색깔이 당신을 틀림없이 매료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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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법감시인 심의필 제2019-E01867호 (2019.04.09)